최근 1980년대 취업자 스펙과 2010년대 취업자 스펙을 비교하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단순 객관적 지표처럼 보이는 이 기사는 사실 기성 세대가 젊은 세대의 취업난에 대한 볼멘소리를 '질타'하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써 제시된 것처럼 보인다. 실례로 2018년 대선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가 청년들에게 던졌던 메세지는 "너희 잘못이 아니야"였는데, 진보 정당 대선 후보의 이미지를 각인 시킨다는 측면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시대 대한민국의 청년들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노력에 대한 적절한 언어는 '질타'의 언어가 아닌 '이해'와 '공감'의 언어여야 할 것이다. 결국 기사는 기성 세대에게 '부재하는 자기 반성'이 연령주의적 차별을 생산하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나라 안팍으로 차별을 둘러싼 논쟁들이 오가고 있다. 여성 차별, 동성애 차별, 경제 소수자(비정규직, 때론 노동자 그 자체) 차별 등에 대한 사회 다층의 설전들...은 현재 차별을 둘러싼 여러 입장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내가 공군 장교로 근무하고 있으면서 겪는 '연령주의적 차별'은 그 성격이 다른 여타 사회적 차별과 성격이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연령주의에 근거한 대한민국 사회 조직의 특성상 사회초년생은 어디서나 심각하게 겪고 있는 문제면서도 논의의 중심에서 벗어나있는 주제 중 하나다. 창의성과 독창성은 신입사원으로 들어가고 얼마 안되어 얼마나 필요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되고, 숟가락 젓가락부터 준비해서 조직 막내의 마지막 건배사로 끝나는 피할 수 없는 회식, 이런 상황 속에서도 조직 문화를 변화시킬 힘은 없어 '꼰대', '아재'라는 단어로 규정하여 젊은 세대의 커뮤니티장에서 기성 세대를 조리돌림하고 있는 현실 등이 그나마 젊은 세대가 연령주의를 '소화'해내고 있는 무기력한 방식이다. 이렇게 젊은 세대는 주체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고 연령주의를 답습한다.
주디 버틀러는 페미니즘의 주체가 '정체성의 정치'속에서 즉각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운동들 속에서 주체는 정치적 사건을 중심으로 시시각각 변화한다. 남성 페미니스트 문제, 동성애 문제, 트랜스의 문제 등에서 페미 진영이 주체 자가검열 과정에서 속앓이를 하는 것은, 차별을 인식하게 한 정치적 사건이 각 존재마다 다르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속선 상에서 나는 연령주의를 중심으로 젊은 세대들의 '연대'를 주장한다. 연령주의적 차별이 현 세대에서 큰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첫째로 연령주의의 차별 주체들이 정당화하는 방식이 여전히 기성 세대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차별 당하는 주체들의 '대응의지'를 상실하게 만든다는 점이고, 둘째는 현 시대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사회 주체들의 연령대가 낮아짐에 따라, 기성 세대와의 갈등을 표출하는 공론장에서 연령주의적 차별은 투쟁과 대립의 형태로 사회 현상화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령주의는 은밀하고 치밀해서 대부분 연령주의의 표출 방식인 언어 폭력이 연대를 이끌만한 정치적 사건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성차별 논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차별에 대한 '커밍아웃'이 지금보다 다 힘겨웠던 것처럼, 혹여 나보다 연령주의에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차별적 사회구조의 힘이 내가 경험한 것보다 강력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두가지 생각 모두 해법은 '연대의지'다. 나는 수동적으로 정치적 사건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나는 사회초년생으로서 겪은 이 차별에 대항한 연대를 통해 위로받고 싶고, 위로하면서 얻어지는 진솔한 관계망을 염원한다. 이것이 공통적으로 권력적 구조 내 피권력자들이 느끼는 "공격성"이 아닌 '연대의지'다. 비록 이것이 권력자의 시각에서 '폭력적'으로 보여질지라도 말이다.
'연령주의적 차별' -연대는 가능한가
2018. 2. 20. 1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