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란 무엇인가 1장

2015.9.30

정진형


옮긴이의 말


지젝은 이데올로기 이론에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라깡 정신분석의 기본 개념에 대한 개설을 제공하는 것과 헤겔로의 회귀를 목표로 내세웠다.  그는 헤겔을 구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이 라깡을 경유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이러한 라깡적 독법과 헤겔의 유산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판단한다. 


*시차적 관점: 지젝은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매개, 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시차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철학과 과학, 정치라는 세가지 주요 양식에 나타나는 시차적 간극에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시차란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급진적 담론을 말하면서 발언 위치, 곧 물적 토대와 시스템 자체는 결코 건드리지 않으며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는 태도가 바로 유사-행동이다. 

eg. 레닌의 논리학 공부


실상은 자유에 어떤 금지가 기입돼 있다는 것이 핵심

우리를 진정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를 과연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정치경제학: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는 점에서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에 대한 고려를 말하고 있으며,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레닌이 이를 해냈다는 것으로 레닌의 반복을 요구한다. 

-반자본주의는 정치적 형식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급진적임’을 달성해야 한다.


이 책과 관련없는 지젝 사유의 전반을 다루고 있으며, 지나친 농축으로 인해 상당한 배경지식을 요구하는 내용(심지어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읽고나서 읽어야할만큼의 배경지식)으로 가득차 있어 옮긴이의 말은 읽다 내려놓는다.



서문


폭군의 피 묻은 예복


매일 저녁 일꾼이 훔친 것은 물건을 담을 줄로 알았던 손수레 그 자체-이를 폭력에도 적용

가시적이고 주관적인 폭력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관적 폭력은 비폭력을 배경으로 하여 경험된다.


객관적 폭력: 우리가 무언가를 주관적 폭력이라고 부를 때 그 배경이 되는, 기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1. 상징적 폭력: 언어를 통해 구현(언어는 이미 시스템에 우호적이다.)
  2. 구조적 폭력: 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결과


인도주의적인 고려는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경제적 고려에 비해 대개 부차적이다. 

미디어들이 인도주의의 위기가 끊임없이 발생한다고 보도해댈 때까지는 복잡한 투쟁의 과정이 있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어떤 어린이의 죽음이 어느 이름 모를 콩고인의 죽음보다 몇 천 배나 더 가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9/11에 슬퍼하는 미국인들은 곧 미국의 정치경제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으로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책은 폭력으로 향하는 6가지 우회로를 말해준다. 폭력은 직접적으로 건드리게 되면 반드시 신비화되기 때문이다.(폭력의 공포감과 희생자에 대한 감정이입으로 인해 사고정지가 일어난다.)

진실과 진정성: 폭력에 노출된 당사자는 가려진 진실을 통해 진정성을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는 폭력을 직접 마주하는 순간 진실을 의심한다. 폭력이라는 것은 진술될 내용이 진술하는 방식에 항상 오염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불가능해진 것은 시가 아니라 산문이다.”


폭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좌파 담론에 만연하는 가짜 급박감-반이론주의적 강렬함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 행동하라”

비판적 분석은 실제적인 조언도 아니며, 명확한 해결책도 아니고, 믿음도 주지 않으면서, 미래의 위기를 눈 앞에 가져다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가장 실제적인 일일 때도 있다. 



SOS 폭력


사견: 여기서 쓰이는 객관적, 주관적 폭력에서의 객관과 주관이란, 얼마나 사적이고, 얼마나 공적이냐의 차이로 보인다. 즉, 직접적인 폭력은 당사자 사이에서만 느끼고 표현되는 폭력인 반면, 시스템에 내재된 방식의 폭력은 간접적이므로 그 범위가 상당히 공적이고 범사회적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객관으로 보여진다는 것을 의미화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의 폭력성은 그들이 주관적인 폭력을 행사하였는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주관적인 폭력의 부재 이면에 존재하는 객관적 폭력의 동조 및 묵인이 있는지에 달려있다.

폭력이란 난데없이 솟아난다.(객관적 폭력의 전환)

객관적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행위자는 자신이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객관적 폭력 시스템 안에서의 모든 순종적인 행위는 언제나 그 시스템에 의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객관적 폭력은 자본주의와 더불어 새로운 형태를 취했다.

물질적 생산과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사회적 현실(생산중심사회)은 자본의 유아론적인 수익성 추구라는 것 없이는 포착될 수 없다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요점이다. 

즉, 자본의 유이론적인 수익성 추구는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익명성을 띄며 폭력을 휘두른다. 


라깡의 현실과 실재

현실: 부단한 상호작용과 생산과정을 행하는 실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현실

실재: 사회적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결정하는, 냉혹하고 추상적인, 유령과 같은 자본의 논리이다.


고차원적인 이데올로기는 각자의 걱정거리들을 가지고 있는 실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척하는 것이다.


헤겔 철학의 기본 규칙

객관의 과잉(기계적으로 법칙을 부과하는 추상적 보편성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배되며, 그와 관련된 주체에 대해서는 그 어떤 관심도 없는 것)이 항상 주관의 과잉(불규칙하고 자의적인 변덕의 행사)에 의해 보완된다는 것이다.


발리바르의 과잉 폭력에 대한 두가지 구분(상반+상호보완적)

  1. 초객관적 폭력: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사회적 조건
  2. 초주관적 폭력: 민족/종교적인 근본주의자들이 행하는 폭력


포르투 다보스의 선량한 사람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포르투 다보스; 유사-행동)

다보스와 포르투 알레그레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유지해 나가면서도 반자본주의 세력이 내세우는 사회적 책임과 생태 문제 등을 지지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

구우파와 구좌파는 모두 보수주의자로서, 새로운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 덧없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스마트: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와 대비되는 역동적, 유목민적 방식을, 상명하복의 권위주의와 대비되는 대화와 협동을, 판에 박힌 일처리와 대비되는 융통성을, 구시대의 산업 생산방식과 대비되는 문화와 지식을, 그리고 고정된 위계질서와 대비되는 자발적 소통과 참여를 가리킨다.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과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지는 지점.

“사회적 책임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유지의 열쇠이다”

“위협을 가하는 것 자체가 그 위협에 대한 치료제”


자본주의의 전성기(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의 의미있는 삶)는 내부에서의 근본적인 대립물(외부로의 소비)이 나올 때 온다.

자본가는 자본과 그 재생산적 순환을 상징하는 단순환 화신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부정할 수 있게 되며, 그의 삶에도 모종의 의미가 생기게 된다. 

이들은 축적이라는 에로스적 도착에서 벗어나 티모스적 인정욕의 충족으로 전환한다.

그들은 개인의 명성을 얻을 수 있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또한 연기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 마을


후기 자본주의적 사회분열이라는 악의 실재는 괴물들이라는 예스럽고 마술적이며 신비로운 악으로 변모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만 그들은 의미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외부적 위협은 공동체 속에 내재된 본질이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 마을의 시민들은 어떤 열정도 헌신도 없는 무심한 인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오직 안락함과 안정성만을, 그리고 서로에 대한 관용의 표현만을 추구한다. 


무조의 세계 속 성생활


자위 마라톤


자신의 빌어먹을 쾌감이라는 유아론적 자기중심벽을 다른 이들과 기꺼이 공유하겠다는 개인들을 동원해 집단을 조직한다. 이는 실재적이라기보다는 외견상의 모순이다.(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과 군중 속으로의 침잠 사이의 연관성)

군중 속에서 혼자인 자는 더 혼자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적 군중 속의 침잠이다.

알랭 바디우의 둘의 만남인 사랑을 통한 진정한 사건의 형성. 상호주체성, 타자와의 대면을 배제하는 자위 마라톤과는 다르다.

타자성이라는 차원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관찰자가 없는, 군중 속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도 타자 사이에서 드러나는 주체의 모습.


포스트 모던 시대는 무조(고르는 주체가 없는)의 시대이다.

-주인기표의 개입이 결여된 까닭에 다양성을 가진 혼란스러운 현실에 어떤 의미 있는 질서도 부여하지 못하는 세상을 뜻한다.


헤겔의 대립물의 사변적 동일성

우리는 어떤 특징, 태도 삶의 규범들이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 그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가장 순수하고 가장 효과적으로 이데올로기가 드러나 보인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오늘날 모든 진보적 투쟁의 적이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의 행위는 체제의 핵심적 문제를 고치지 않고, 부차적인 원인들을 제거함으로서, 체제의 핵심적 문제들이 더욱더 드러나도록 하는, 체제 자체의 문제를 직접 구현하는 화신이다.


Q1: 대립물의 일치에 대한 이해가 없다. 이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단 말인가.

PA: 표몰이를 해야 하는 민주주의일수록 핵심 지지 세력은 더욱 필수적이다. 그리하여 권력자가 광범위한 유권자보다 핵심 세력의 이익을 우선할 때, 민주주의와 독재는 대립물의 일치를 이루게 된다. (출처: http://ya-n-ds.tistory.com/m/post/294)

이러한 조건적 명제에서 보여지는 대립물의 일치는 언뜻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대립물의 일치라는 것은 헤겔적인 의미의 모순 개념과 닿아있는  것으로 이는 발전상태의 논리, 변증법적으로 읽어내야 한다. 도대체 읽어야 하는 책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Q2: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모순적 위치의 명료성이 떨어진다. 또 다시 텍스트 이해의 문제에 봉착했다.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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