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내 존재의 심각한 위기가 왔다. 그 위기는 부정과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도피했던 나의 ‘한동인’이라는 정체성이다. 행동하는 것에 대한 ‘확신 불가능성’과 확신 불가능한 나의 ‘현실적 한계’를 핑계로 방관했던 한동대학교의 부조리함과 편협, 배타성에 대하여 ‘침묵’한 것이 최근 한 목사의 면직 통보로 점철되었다. 침묵의 댓가는 엄청났다. 뒤늦게 발견한 내 안의 죄책감과 기독교 혐오라는 ‘구체성 없는 규정화’로 벌어진 이 일을 부끄러움으로 마주한다.

지난 연령주의적 차별에 대한 연대라는 글에서 내가 주장한 연대의지는 허구였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결국 위로받고, 위로하고자 하는 선에서 머무는, 자기 반성의 ‘결여의 산물’이다. 세계에서 나의 행동이 위로받고자 하는 피해자의 입장 뿐이라는 이 왜곡된 자기 반성은 결국 내가 잠정적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고작 긴 글로 현혹시켜 얻으려던 것이 ‘뭉클함’이었다는 것은 나의 치부다.

나는 재학 시절 침묵으로 ‘폭력가능성’을 잠정 중단시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반면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한동대학교라는 매우 구체적인 장소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로 ‘구조적인 폭력’은 더욱 굳어져 단단해지고 있었다. 이번 동성애 강연 문제로 벌어진 사건마저 우스꽝스럽다 여기며, 제 3자의 입장에서 웃고 떠들었던 것을 반성하고, 이제야 책임을 느끼며 말을 아끼려는 가해자의 추악함을 어떻게 떨쳐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 부끄러움으로 뭐든 하겠다는 의지가 유일한 내 속죄의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

나와 상관없는 사건에 나의 경험이 반응하여 참여하기까지 다른 차원의 감수성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당사자가 느끼는 고통을 마치 내가 직접 경험한 것처럼 느끼는 것, 이 때 발생하는 나와 타자 사이의 불가능성에도 물러서지 않고 내 존재를 다른 존재에 비비려는 노력, 이 두가지는 그동안 침묵하여 사건에 당사자성이 결여된 주변인들의 책임감이다. 나는 이 사건의 침묵으로 일관한 가해자이며, 동시에 우연히 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게 된 운좋은 주변인이다. 나는 위로받고, 위로하려는 차원을 넘어 내 감수성과 집중력을 다해 한동대학교 부당 재임용 거부 사건에 참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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