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한 정의에 기대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하는 설명적 방법과 그림을 그리듯 감정이든 이미지든 시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는 듯 하지만, 하나는 이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하나는 직관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다. 신기한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은 이 둘 사이의 구분을 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때 이성을 요구할 것인지 직관을 요구할 것인질 무의식 중에 선택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대상을 전달하는데에 있어 이 두가지 방법을 구분하여 선택하는 것일까?
설명적 방법에 대한 한계성을 인식하고 난 후에 나는 직관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이 무언가를 아는 것에 있어서도, 누군가에게 내가 아는 것을 전달하는데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나는 직관을 요구하는 방법으로 전달하는 전달자에게서 더 많은 것을 보곤 한다. 때론 전달자와 나 사이에 인간이라는 동질성이 느껴지기도, 내 감정과 기분이 예기치 못한 반응을 하는 것으로 대상이 나를 넘어선다고 느끼는 듯 하다. 이데아의 세계와 신적인 것들을 바라며 책을 읽던 시절의 내가 아직도 살아 꿈틀대는 듯, 절대적 확신의 영역에 있는 대상을 욕망하던 내가 대상의 특수함을 절망하고, 오히려 신성한 방법으로 각 대상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을 취한 것일테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조각조각 분석된 대상의 모던적 내부 구조가 아니라,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본질, 즉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생생한 대상,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철저한 분석은 대상에 더 가까이가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은폐하고 대상을 저 멀리 피안의 세계에 보낸 후, 통제 가능한 세상에 대상을 새로이 해부된 채로, 또는 박제된 채로 전시하는 것으로, 따라서 분석 이후의 대상은 영영 사라져버리고 만다.. 반면에 시적 묘사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대상이 마치 내 눈 앞에 보이듯 살아 숨쉬게끔 하는 신적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명적 방식의 대상을 대할 때는 차가움으로 반응하지만, 묘사적 방식의 대상에게는 뜨거움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효율성과 합리성은 인간에게 이미 절단 폭력과 해부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회 구조를 보여준다. 이로부터 현대인들에게 이 세상이 정없고 삭막하다는 한탄은 눈부신 경제 발전과 과학기술 문명과 더불어 뜨거움을 결여하고 있는 인간의 향수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결여는 여가의 영역에서 간신히 충족되고 있고, 자투리의 영역에서 고민되고 있으며, 삶의 주요한 부분으로는 영원히 인정되지 않음으로써 뜨거움은 차가움을 물리치지 못하고 불을 지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즉 영화, 드라마, 음악, 시, 소설 등은 효율성을 충족하지 못한 구구절절함의 산물들이며, 합리성을 충족하지 못한 어쩌구저쩌구의 산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일과 시간에 결여가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않는 통제 아래서 여가 시간에는 되도록이면 소비하도록 장려되는 것들로서 근근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생생한 것들은 남은 시간으로 밀리고, 죽은 것들은 하루의 가장 중요한 시간에 다뤄진다. 이로써 현대인들은 스스로 죽은 자들이라 이름 붙이며, 살아 있을 것을 영원히 바라면서도 반대로 영원히 죽어있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죽어있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이 세상이 마치 성대한 장례식마냥 죽음을 비꼬듯 화려하기만 하다.